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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부 편 - 화성 외금양계비는 왜 세워졌을까?

기사승인 2020.05.24  23:3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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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화성시 정남면 관항리와 봉담읍 왕림리의 경계에 태봉산이 위치하고 있다. 태봉산의 정상에는 백제 때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봉산성이 있어, 인근의 화성 마하리 고분군(사적 제451호)과 함께 화성시의 백제 유적을 이해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한편 태봉산 정상에서 관항리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낯이 익은 표석을 하나 볼 수 있는데, 바로 외금양계비(外禁養界碑)다. 우선 외금양계비의 외형을 보면 동 시기에 제작된 안녕리, 만년제 표석과 그 형태나 글씨체가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해당 표석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태봉산의 남향에 세워져 있기에 의도를 가지고 세운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해당 표석은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웠던 것일까?

태봉산의 남향에 세워진 외금양계비

■ 『일성록』과 현장의 교차 분석을 통해 확인해보는 외금양계비

흔히 조선 후기 왕의 일기라고 부르는 『일성록』이 있는데, 『일성록』은 1760년~1910년에 이르기까지 왕과 신하들 간의 국정과 말을 기록한 책이다. 이러한 『일성록』에 외금양계비와 관련한 중요한 기록이 확인된다. 우선 외금양지(外禁養地)와 관련해 1791년 3월 30일 중희당(重煕堂)에서 조심태를 접견한 정조는 원상(園上, 주: 현륭원)에서 홍범산(洪範山)까지 몇 리인지 묻는다. 이에 조심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 거리는 10리 남짓 될 것입니다. 이 산은 바로 외금양(外禁養)에 해당하나 산 아래에 인가가 가장 많으므로 수목을 금양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중략>”
- 『일성록』 정조 15년 신해(1791) 3월 30일(갑진) 중

또한 1792년 2월 17일 조심태는 정조를 알현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략>... 독산산성(禿山山城)으로 말하면 여기부터는 외금양(外禁養)인데 아직 한 그루도 배양한 것이 없습니다. 산성에 접한 한 면의 민정을 중군(中軍)에 떼어 주어 나무를 심는 데 전념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일성록』 정조 16년 임자(1792) 2월 17일(병진) 중

즉 이러한 기록을 통해 홍범산과 독산성 일대가 외금양지로 지정된 사실과 이후 홍범산(洪範山) 일대가 화소로 추가 지정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오산 독산성. 『일성록』을 통해 외금양지로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성 홍법산에 자리한 효암. 최루백의 일화가 전하는 장소로, 효암이 위치한 산이 『일성록』에 언급된 홍범산(洪範山)이다.

한편 1798년(=정조 22년) 2월 19일에 조심태는 정조에게 원소 밖의 금양 하는 곳은 곧 태봉(台峯)이 경계라고 말하고 있으며, 현륭원 영(顯隆園令) 서직수(徐直修)의 말을 전하고 있다. 서직수는 산 아래에 사는 신광린(申光隣)이 올린 정소(呈訴, 주: 소장, 혹은 민원의 성격)한 내용을 언급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원소 밖에서 금양한 뒤로는 산 주변에 사는 백성들이 비록 무덤이 있더라도 감히 봉금(封禁)한 곳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봉금하는 데에 또한 온 힘을 쏟지 않으니 촌백성들이 갖가지로 외람되이 범하므로 숲이 울창하게 우거질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상(上)·중(中)·하(下)의 민호(民戶)가 계(契)를 만들어 계중(契中)에서 엄히 과조(科條)를 세워 금단(禁斷)하고,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가 중할 경우에는 관(官)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고 가벼울 경우에는 계를 따라 벌을 시행하여 실효를 거둘 수 있게 하소서.”
- 『일성록』 정조 22년 무오(1798) 2월 19일(계축) 중

전면에서 바라본 외금양계비.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이에 조심태는 신광린의 정소(呈訴)가 일리가 있다고 봤으며, 우선은 그대로 정소대로 시행하되 원소 밖의 금양을 동계(洞契), 즉 마을의 자치조직에만 맡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고,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린다.

“속히 본부(本府)로 하여금 산허리 아래에 금표와 표석을 새겨서 세우게 하고, 또 현륭원 영으로 하여금 지금 나무를 심는 때에 금석(禁石) 사이에 소나무와 잡목(雜木)을 줄지어 심어 여러 겹으로 둘러싸서 경계를 표지(標識)할 수 있도록 한다면 대소(大小)의 촌민이 아마도 징계를 받을까 두려워할 바를 알 것이니 감히 멋대로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 『일성록』 정조 22년 무오(1798) 2월 19일(계축) 중

이에 정조가 조심태의 의견을 받아들여 표석을 세울 것을 지시한 결과 태봉산에 외금양계비가 세워질 수 있었다. 즉 외금양계비에 대한 내용은 『일성록』의 기록을 통해 확인, 검증이 가능한 것이다.

■ 외금양계비, 융릉과 건릉의 원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자료다.

측면에서 바라본 외금양계비. 이번 기회를 통해 화성시의 소중한 문화재인 외금양계비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이처럼 태봉산이 외금양지로 설정이 되었지만 한 동안 홍범산 일대의 금양(禁養)에만 신경을 썼는데, 금양지로 설정이 될 경우 ▲나무의 벌채 금지 ▲분묘의 조성 금지 ▲농경지 조성 ▲가축을 기르는 행위 등이 불가했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그린벨트의 성격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태봉산에 세워진 외금양계비는 나무의 벌채 및 분묘, 농경지 조성, 가축을 기르는 행위를 금지하고, 더 나아가 경계를 설정하는 표석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외금양계비가 세워진 뒤 행위에 대한 처벌이라는 법적 구속력이 생겼음을 보여주기에 외금양계비가 가지는 의미는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한편 정조는 조심태에게 홍범산처럼 태봉산이 울창해지려면 어느 정도가 걸리겠냐고 물어보는데, 이에 조심태는 2~3년 안에 울창해질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애초 태봉산 일대가 황폐해져 있었다는 사실과 외금양지로 설정, 태봉산에 나무를 심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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