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소재한 서삼릉은 아직 공개되지 못한 묘역이 많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오늘 소개할 ‘원빈묘(元嬪墓)’에 담긴 이야기는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빈과 귀인의 묘역에 자리한 ‘원빈묘’의 주인공은 정조의 첫 번째 후궁이자, 당대의 권력자였던 홍국영의 누이동생이었다. 원빈 홍씨(1766~1779)는 조선 역사상 최초로 간택을 통해 빈으로 봉해진 경우인데, 이는 정조(재위 1776~1800)와 효의왕후 김씨(1753~1821, 이하 효의왕후) 사이에 후사를 얻지 못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효의왕후가 생존해 있음에도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홍국영과 효의왕후 간 갈등 요소로 남게 된다. 한편 원빈 홍씨가 빈으로 간택된 것은 어느 정도 홍국영의 배경이 뒷받침을 했는데, 홍국영이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인물이라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보면 가례를 올린 누이동생이 아들을 낳을 경우, 서열상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홍국영 자신은 외척이 되어 더 막강한 권세를 휘두를 수 있었다는 점도 한몫을 했다.
측면에서 바라본 빈과 귀인의 묘. 한 곡장 안에 여러 개의 묘역이 조성된 모습으로 마치 공동묘지의 형태이다. |
회묘에서 바라본 빈과 귀인의 묘 전경 |
■ 원빈 홍씨의 묘제 양식의 변화... ‘인명원(仁明園)’에서 ‘원빈묘(元嬪墓)’로 격하되다
1778년(정조 2년) 6월 27일 정조와 원빈 홍씨가 가례를 올렸다. 당시 원빈 홍씨의 나이는 14살로, 이때부터 원빈이라는 작호와 숙창궁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불과 1년 뒤인 1779년(정조 3년) 5월 7일 원빈 홍씨는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와 관련해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서는 원빈의 죽음에 효의왕후가 개입했다고 의심하고 있어, 홍국영과 효의왕후 간 대립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당시 홍국영(1748~1781)은 효의왕후에 대해 견제를 하고 있었는데, 이는 효의왕후가 아들이라도 낳게 된다면 자신의 권력기반이 무너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권력에 집착했던 홍국영은 더욱 무리수를 두게 되는데,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후 완풍군)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들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에 대해 그동안 보고도 못 본체했던 정조는 불쾌감과 함께 칼을 빼들게 되고, 결국 홍국영의 몰락으로 귀결된다. 한편 원빈 홍씨가 세상을 떠난 뒤 최초 ‘인명원(仁明園)’으로 불렸다. 통상 원(園)은 세자나 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의 어머니 등에 한해 붙여졌기에 이러한 조치는 당시에도 논란이 된 부분이었다. 게다가 예법을 중시했던 조선이었기에 일개 후궁의 묘가 원을 칭한다는 부분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된 부분이다. 그럼에도 홍국영이 권력을 가진 동안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홍국영의 실각과 함께 ‘인명원’의 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상소가 이어졌다. 이 중 1782년(정조 6년) 첨지중추부사 정술조가 올린 상소문에는 원과 묘가 한 글자 차이지만, ‘인명원’의 원을 그대로 보존시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원빈의 묘가 다른 빈과 비교하면 사치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또 다른 상소문에서 정술조는 ‘인명원’은 일개 후궁의 묘이자 조정에 없던 제도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인명(인명)이 문정왕후의 휘호인 점을 들어 부당함을 지적하는 상소를 이어갔다. 이러한 상소에 정조 역시 처음에는 개입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계속되는 상소에 결국 원에서 묘로 강등하는 것을 허락하게 되고, ‘인명원’은 ‘원빈묘’로 바뀌게 된다.
빈과 귀인 묘에 자리한 원빈 홍씨의 ‘원빈묘’. 상석에 ‘원빈홍씨지묘’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
■ 잊혀진 ‘원빈묘’. 한 여인의 삶을 통해 바라보는 권력의 민낯
원에서 묘로 격하된 ‘원빈묘’는 지금의 성북구 안암동에 자리한 고려대학교 내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예전에는 애기능 터로 불렸다. 최초 원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조선왕릉의 예법에 따라 진입공간의 금천교와 홍살문. 제향 공간의 핵심인 정자각과 피장자를 알려주는 비각, 마지막으로 원칩 공간에 세워진 석물 등으로 조성이 되었다. 하지만 묘로 격하되면서, 묘에 걸맞지 않은 정자각과 홍살문 등이 훼철이 되고 비석 역시 고쳐서 세워졌다. 이후 ‘원빈묘’는 1950년 6월 13일 지금의 서삼릉 내 비공개 지역인 빈과 귀인의 묘로 이장이 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원빈묘’는 봉분과 그 앞으로 상석과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봉분의 좌측에 비석이 세워진 초라한 형태이다. 이 가운데 상석의 중앙에 ‘원빈홍씨지묘’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최초 ‘인명원’으로 조성되었던 ‘원빈묘’는 원의 격식에 갖추어 세워졌다가 묘로 격하되면서 제향 공간을 비롯한 원의 격식에 맞지 않는 건물이 훼철이 되었으며, 이후 서삼릉으로 옮겨지면서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원빈묘’는 묘제로만 보면 일반 후궁의 묘와 다를 바 없지만, 앞선 사연들로 인해 그 의미가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원빈 홍씨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정조와의 가례도, 뜻하지 않은 죽음 뒤 ‘인명원’으로 높여진 격 역시 홍국영에 의한 것이었다. 자신의 누이동생을 이용해 권세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기에 한 여인으로서의 삶으로 보자면 원빈 홍씨는 참 불행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서삼릉의 비공개 지역처럼 이곳에 원빈 홍씨의 묘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힌 원빈 홍씨. 어쩌면 홍국영의 무리한 욕심이 불러온 ‘원빈묘’의 명칭 변화는 한 여인의 삶을 통해 바라보는 권력의 민낯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할 만하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