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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된 차계영 선생의 생가에 대한 관심이 필요해

기사승인 2021.09.02  07: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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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水原)은 정조대왕의 효심과 개혁정신이 깃든 곳으로 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금의 수원은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의 계획 아래 세워졌는데, 조선의 르네상스로 평가받는 정조의 재위 기간에 군사적・상업적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수원 화성 건설을 계획했다. 이처럼 수원은 그 역사적 의의가 작지 않은 곳이지만, 아픔도 많이 서려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찬란하던 당시만을 기억하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같은 민족의 아픔이 서린 시대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수원은 3.1운동의 유적지이자 당시의 독립 열망과 아픔이 담긴 곳이다. 특히 신작로(新作路)는 이러한 관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신작로는 다수의 일본인들이 모여 살며 부흥골목을 이뤘다. 특히 1918년 수원 인쇄 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20세기 초에 인쇄업은 첨단산업으로 취급되었다. 때문에 인쇄거리로 불리며 호황을 누렸지만, 공공기관의 이주와 프린트의 보급 등 환경적 변화와 함께 지금은 쇠락해버린 구 도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쇠락해버린 신작로를 부흥시키기 위해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외형적으로는 보도블럭이 깔리고, 근대문화유산을 활용한 공간과 여러 시설을 짓는 등의 노력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수원 화성에 비해 존재감의 측면에서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단순히 홍보의 문제로만 치부할 것이 아닌 것이 신작로를 방문하는 젊은 연령대의 관람객들을 붙잡을 만한 요인들이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들의 니즈를 충족시켜줄 카페나 포토존 등은 아직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주 고객층을 대상으로 한 전략적인 마케팅 전략과 카페나 포토존 등의 시설 확충 등의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재 신작로에서는 근・현대 문화유산마저 제대로 된 보호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그 사례로 차계영 열사의 생가를 들 수 있다.

차계영 선생은 19살의 나이에 경성제국대학 반대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수감되어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다. 하지만 그의 이름과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일뿐더러, 여러 플랫폼에서는 그의 업적과 생애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게다가 네이버와 다음, 구글 등의 지도에서도 ‘차계영 열사의 생가’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잊힌 문화유산인 것이다. 더 문제인 것은, 골목 안 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으며 제대로 된 시설 관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담장은 이미 다 허물어졌고, 철봉과 부직포로 대충 막아놓은 상황이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났고, 수원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독립운동가의 생가임에도 불구하고 방치되어 있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들이 남긴 발자취를 보존하고, 여러 안내문을 세워 알리는 것은 신작로와 근대문화, 그리고 산루리라는 공간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를 방치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알리고, 환경을 개선하면서 향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차계영 선생의 생가 보존 및 안내문 설치가 필요하다.

이정은(영복여고 1학년) mail@newstower.co.kr

<저작권자 © 뉴스타워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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