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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 설치된 일제강점기 상징물 안내판을 아시나요?

기사승인 2023.01.13  17: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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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어떤 장소를 찾을 때면 그곳에 있는 안내판에 눈길이 간다. 해당 장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다 보니 어떻게 보면 안내판이 첫인상과도 같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안내문을 접하기에, 안내문의 내용은 최대한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용어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최근 눈길을 끄는 안내판이 있어 주목되는데, 바로 일제강점기 상징물 안내판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해당 안내판은 경기도 일제 잔재 청산 및 항일 관련 역점 사업 중 하나로, 현재 수원에는 ▶구) 농촌진흥청 혼다 코스케 흉상 좌대석 ▶홍난파 동상(올림픽 공원) ▶홍난파 노래비(팔달산) ▶치산치수지비(수원박물관) 등에 세워져 있다. 오늘은 해당 안내판이 설치된 역사의 현장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 혼다 코스케 흉상 좌대석

구) 농촌진흥청의 경내에는 이름도 생소한 혼다 코스케의 흉상 좌대석이 있다.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은 1906년 일제 통감부에서 설치한 농사시험 연구기관으로, 지금도 이곳에는 권업모범장이었음을 보여주는 표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권업모범장의 초대 장을 지낸 인물이 바로 농학 박사인 혼다 코스케(本田幸介)다.

구) 농촌진흥청 경내에 자리한 권업모범장 표석과 혼다 코스케 흉상 좌대석
혼다 코스케 흉상 좌대석

그런데 혼다 코스케의 흉상 좌대석은 <순종실록> 부록에서도 확인된다. 1924년 8월 12일에 순종이 권업모범장에 일금 300원을 하사했는데, 이는 혼다 코스케의 동상 건립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 남아 있는 좌대석의 전면에 ‘본전행개선생(本田幸介先生)’, 후면에는 대정 13년(1924)이 새겨져 있어 위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혼다 코스케 흉상 좌대석 안내판
권업모범장 표석

최초 권업모범장 관련 흔적을 찾기 위해 찾았다가 바로 옆에 있는 정체불명의 좌대석을 보고, “이게 대체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다시 현장을 방문해 보니 안내문이 세워져 있어 해당 석물이 혼다 코스케의 흉상 좌대석이라는 것과 세운 배경, 시기 등을 알 수 있었다. 안내판을 통해 해당 장소를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된 것이다.

■ 홍난파 동상과 노래비

수원 올림픽 공원의 외진 곳에 홍난파 동상이 있다. 후면에 있는 동판을 보면 동상은 1989년 10월 14일에 ‘제38차 JC 전국회원대회 기념’으로 제작되었는데, 김왕현이 조각했다. 전면에는 홍난파에 대한 글과 <봉숭아(봉선화)> 악보가 있다. 이 밖에 팔달산 자락에는 홍난파 노래비가 있는데, 전면에 홍난파의 대표곡인 <고향의 봄> 악보가 있다. 해당 노래비는 1968년 10월 15일에 화홍문화제 기간에 세워졌다. 이 두 곳에도 일제강점기 상징물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올림픽 공원에 자리한 홍난파 동상
안내판이 설치된 홍난파 동상

홍난파는 난파 홍영후(1898~1941)로, 지금도 애창되는 <고향의 봄>과 <봉선화> 등을 작곡한, 근대 음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과는 별개로 홍난파는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히 동시대의 인물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이육사(李陸史, 1904~1944) ▶홍사용(洪思容, 1900~1947) 등과도 비교된다.

팔달산에 자리한 홍난파 노래비
안내판이 설치된 홍난파 노래비
훼손되기 전 홍난파 노래비
훼손된 이후 홍난파 노래비

그래서였을까? 홍난파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은 노래비에도 그대로 투영이 되어 있다. 지난 2019년 본지에서 홍난파 노래비를 소개할 때만 해도 얼굴 부분의 동판과 이름이 있었으나, 지금은 훼손되어 사라진 모습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노래비의 모습에서 현재 홍난파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 수원박물관으로 옮겨진 치산치수지비

지난 2018년 본지에서 소개한 적이 있던 치산치수지비(治山治水之碑)는 본래 파장사거리 부근에 있었으나 지금은 수원박물관의 야외로 옮겨졌다. 치산치수지비는 1941년에 세워졌는데, 세운 목적은 이름처럼 치산치수(治山治水: 산림을 관리해 홍수와 가뭄 등의 재해를 방지)와 관련이 있다. 해당 비석을 통해 당시 광교산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인해 하천 바닥이 높아지고, 홍수 등의 피해가 있어 사방사업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박물관으로 옮겨진 치산치수지비. 바로 옆에 수룡수리조합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치산치수지비
안내판이 설치된 치산치수지비

이렇게 옮겨진 치산치수지비의 앞쪽에도 일제강점기 상징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이와 함께 주목해볼 또 하나의 흔적이 치산치수지비 바로 앞쪽에 있는데, 바로 원천유원지에서 옮겨진 수룡수리조합기념비다. 두 비석은 식민지 시기의 농업과 치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오늘 소개한 4곳의 장소에 설치된 일제강점기 상징물 안내판을 두고 혹자는 치욕적인 흔적을 왜 없애지 않냐고도 한다. 하지만 없앤다고 해서 없어질 역사는 아니기에 오히려 그러한 역사의 잔재일지라도 없애기보다는 이를 정확히 알려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저작권자 © 뉴스타워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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