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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명료함을 느끼는 여행의 순간

기사승인 2022.10.25  10: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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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가을 제주도 여행에서 계획한 것 중 하나는 한라산 등반이었다. 한라산 백록담까지 올라가 보는 것. 체력이 어떨지 가늠이 안되긴 하지만 백록담까지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괜히 흥분되었다. 관음사 코스와 성판악 코스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코스로 갈까 고민하기도 하고, 사진을 보면서 얼른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6~7시간씩 산행을 해본 적은 없는데 뭔가 등산이라고 하는 진짜 첫 경험 같았다. 이번에는 꼭 한라산 백록담을 가리라.

아. 그러나 결론은 한라산 백록담 오르는 것은 실패로 끝났다. 왜냐하면 한라산 등산은 하루에 방문객 800명으로 제한하고, 미리 예약된 사람만이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당일 알았기 때문이다. 만만하게 하루 전날만 예약하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한라산 등산로 중 ‘윗세오름’으로 올라가는 길은 예약 없이 오를 수 있었다. 영실코스라고도 하는데 ‘윗세오름’은 한라산 중턱 1600m까지 오르는 길이다. 왕복 4시간 정도 걸렸다.

성게 보말 미역국으로 아침을 든든히 먹고, 영실코스 주차장까지 차를 타고 이동한 다음 등산로 입구에서 인증샷을 사진으로 남기고 한라산에 들어섰다. 바람이 거센 날씨였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너무 춥고 으슬으슬하기까지. 얼굴을 들지 못하거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가 순식간에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날씨가 시시각각 변하는 곳이었다. 숲길을 지나고, 계곡길을 지나고, 조릿대와 억세밭을 지나고, 점점 위로 올라갈 때마다 신기한 풍경들이 펼쳐졌다. 계속 풍경이 달라지는 것도 놀라웠다. 구름은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순식간에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단풍은 절정이었고, 알록달록한 색들이 가을 느낌 물씬이었다. 한라산에 서 있는 내가 과연 진짜 현실인가 싶을 정도였다. 다른 세상에 놓여있는 것 같기도 했다. 천천히 쉬엄쉬엄 걸었지만 끝없는 계단에 지칠만 할 즈음, 평탄한 초원이 펼쳐지면서 순식간에 윗세오름 정상이 나타났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것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산을 오를 때는 힘들지만, 내려갈 때는 좀더 수월해진다. 모든 일들이 그렇지 않은가. 어느 순간 정점에 오른 이후부터는 편안해지는 기분 말이다. 익숙해서일 수도 있고, 몸이 단련되어서일 수도 있다. 산을 오를 때마다 인생이라는 산을 생각하게 된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고, 내 두 다리로만 가야 한다. 자동차나 기차를 탈 수도 없다. 정상에 이르는 길은 여러 길이 있겠지만 모두가 평등하게 자신의 다리로 걷는다. 등산을 하면 가진 자, 없는 자, 잘 생기거나 못 생기거나, 많이 배웠거나 적게 배웠거나 상관없이 모두 동등하다.

어리목 탐방로로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돌 길이 많았다. 현무암 그대로 울퉁불퉁한 암석이어서 발을 잘 디뎌야 했다. 발목을 삐끗할 수도 있으니 조심조심. 울창한 숲길을 걷고, 광활한 하늘을 바라보며, 따스한 햇살이 점점 내리쬐었다. 영실코스로 올라갈 때 거세었던 바람이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단풍은 은은한 파스텔 빛이고, 설악산 단풍과는 또 다른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언제 또 한라산을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한 번의 경험이 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다는 것, 멀게만 느껴졌던 한라산이 한층 더 가까워진 날이었다.

여행을 하게 되면 아침 일출부터 깜깜한 밤까지 하루를 꼬박 잘 쓰게 된다. 내가 지닌 시간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더 잘 쓰게 만들고, 경험치가 확장된다. 밤에는 또 얼마나 잠이 잘 오는지. 단순하고 건강한 삶이 가능해진다. 조금만 일상을 벗어나게 되면 예상치 못한 삶의 명료함에 빠져든다. 별것 아닌 것에 목숨 걸지 않게 되고, 가능한 많이 걸으면서 자연과 더욱 가까워진다. 제때가 되어 맛있는 것을 먹고, 평화로운 풍경들을 마주하면서 마음이 고요해진다. 화나는 일도 적고, 마음도 넉넉해지는 시간이다.

김소라 기자 mail@newstower.co.kr

<저작권자 © 뉴스타워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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