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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태실 - 방치된 광주 원당리 연산군 왕자 돈수 태실

기사승인 2019.10.21  01: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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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경기 지역의 태실 가운데 태실이 밀집되어 조성된 지역을 꼽자면 포천시와 광주시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광주의 경우 ▲태전동 성종 태실지 ▲원당리 연산군 왕자 돈수 태실 ▲원당리 성종 왕녀 태실 2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들 태실이 있는 곳의 지명을 살펴보면 태전동(胎田洞)의 경우 태실이 있어 붙여진 지명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원당리(元堂里)는 원지(元池)라는 연못이 있어 붙여졌다고도 하며, 다른 지역의 경우 신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지도를 보면 마을회관 뒤로 ‘원댕이’라는 지명을 확인할 수 있는데, 으뜸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러한 원당리에 소재한 태실 가운데 눈에 띄는 태실이 연산군 왕자 돈수의 태실로, 태실 가운데 드물게 태주가 확인된 태실이다.

연산군 왕자 돈수 태실이 위치한 태봉. 편의상 앞태봉 혹은 앞쪽 태봉으로 부른다.
태봉의 정상. 현재 태실비를 제외한 태실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다.

광주 원당리 연산군 왕자 돈수 태실은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산 30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원당리 마을회관을 기준으로 앞쪽에 있어 앞쪽 태봉에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마을회관 뒤쪽의 산은 뒤쪽 태봉이라고 해서 성종 왕녀의 태실 2기가 소재하고 있으니, 원당리는 그야말로 태실을 품은 동네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보통 태실은 산의 정상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현재 연산군 왕자 돈수 태실의 경우 태실비를 제외하면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태실비 역시 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상에서 50m 아래 떨어진 채 방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아니다 보니 이정표나 안내문 등이 전무해 알고 가지 않는 이상 초행길에 찾기란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연산군 왕자 돈수는 어떤 인물일까?

■ 중종반정과 함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연산군 왕자 돈수​

연산군 왕자 돈수(1501~1506)의 흔적은 생각처럼 많지가 않은데, 심지어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확인되고 있지 않다. 또한 돈수와 관련한 기록은 기록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차 연산군 때 1건, 중종 때 3건 밖에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 중종 때의 기록은 유배와 사사당한 기록 밖에 없기에, 실질적으로 돈수에 대한 기록은 아기 때 허침의 집에 나갔다는 기록이 유일한 셈이다. 따라서 기록의 부재로 돈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사사당할 때 군호도 받지 못한 상태인데다, 나이 역시 어렸다는 점에서 단순히 아버지가 연산군이라는 이유로 비극적인 죽음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울 연산군묘. 아버지가 연산군이라는 이유로 5살의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연산군 왕자 돈수

한편 연산군이 폐위된 뒤 돈수는 우봉(牛峯)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뒤 이어 반정공신들의 압박 속에 중종은 연산군의 아들인 폐세자 이황, 창녕대군 이성, 양평군 이인, 이돈수를 사사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당시 중종은 왕자들의 나이가 어린데다 위협이 되지 않는다며 인정상 못하겠다고 버텼지만, 그럼에도 반정공신들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사사하겠다는 결정을 내려야 할 만큼 왕권이 약했던 상황이었다.

“황 등의 일은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으나, 정승이 종사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므로 과감히 좇겠다.”

하였다. 명하여 황ㆍ성ㆍ인ㆍ돈수를 아울러 사사(賜死)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중종 1년 9월 24일 자 기사 중

■ 방치된 연산군 왕자 돈수의 태실비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때

이러한 연산군 왕자 돈수의 태실이 바로 원당리 앞쪽 태봉에 자리하고 있는데, 정상까지는 이미 민묘가 들어서 있어 접근성 자체는 나쁘지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정상에서 태실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운데, 태실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보면 그냥 일반적인 야산에 지나지 않을 풍경이다. 연산군 왕자 돈수의 태실비는 부러진 산불 감시초소 아래 쪽, 정상에서 50m 아래 떨어진 곳에 눕혀져 있는 형태로 방치되어 있다. 의외로 방치된 것에 비해 보존 상태는 굉장히 좋은 편에 속하는데, 앞면의 경우 전체 명문의 육안 판독이 가능한 수준이다.

정상에서 50m 아래 눕혀진 채 방치된 연산군 왕자 돈수 태실비
태실비의 앞면. ‘왕자돈수아지씨태실(‘王子敦壽阿只氏胎室)’이 새겨져 있다.

우선 앞면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왕자돈수아지씨태실(‘王子敦壽阿只氏胎室)’이 새겨져 있어, 해당 태실이 연산군 왕자 돈수의 태실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뒷면의 경우 눕혀져 있어 확인이 어렵지만, 논문이나 기타 자료를 취합해보면 ‘홍치십팔년이월십구일해시장(弘治十八年二月十九日亥時藏)’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지석 역시 확인이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도굴의 결과 해당 태지석이 확인이 된 경우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태지석과 태항아리를 소장하고 있다. 태지석의 명문을 보면 ‘황명홍치십사년이월초사일미시생왕자돈수아지씨홍치십팔년이월십구일해시장(皇明弘治十四年二月初四日未時生王子敦壽阿只氏弘治十八年二月十九日亥時藏)’으로 확인되었다.

알고 가지 않는 이상 찾기 쉽지 않은 연산군 왕자 돈수 태실. 당시의 시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서 바라볼 지점이다.

홍치는 명나라의 황제인 효종(=홍치제)의 연호로, 홍치 14년을 환산해보면 1501년(=연산군 7년)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실의 경우 태어난 지 4년 뒤인 1505년에 조성했음을 태지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연산군 왕자 돈수 태실과 관련한 정보는 논문이나 일부 자료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 관련 정보를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해당 장소를 알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원당리를 지나면서도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곳으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 장소이기도 하다. 마치 버려진 채 방치된 연산군 왕자 돈수 태실비의 현재 모습은 돈수의 비극적인 죽음과 교차되고 있기에 당시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서 바라볼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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