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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 아들과 아버지 (2) - 인조와 정원대원군(추존 원종)

기사승인 2019.10.21  01:3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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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여기 두 기록이 있다. 하나는 조선의 역사를 해석하는데 기본이 되는 <조선왕조실록>, 또 다른 하나는 장릉지(章陵誌)다. 그런데 두 기록에 등장하는 동일한 인물이 서로 극명되고,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면 과연 어떤 기록을 더 신뢰할 수 있을까? 바로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정원대원군, 추존 원종, 1580∼1619)에 대한 이야기다. 선조의 일개 왕자에 불과했던 정원군이 대원군을 거쳐 추촌 왕이 되는 과정을 보면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정통성이라는 측면을 부각시켜야 했던 인조의 속사정이 더해져 조선 역사에서 유일하게 세자가 아닌 왕자가 추존 왕이 되는 역사의 한 장면을 남기게 된 것이다.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정원군의 추존에 매달리다

조선 역사에서 반정(反正)이 성공한 사례는 단 두 차례에 불과하다. 하나는 중종반정(1506)으로 폭군인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중종, 재위 1506~1544)을 옹립했던 경우와 인조반정(1623)을 통해 광해군(재위 1608~1623)을 몰아내고 능양군(=인조, 재위 1623~1649)이 이를 주도해 왕위에 오른 경우다. 중종의 경우 반정세력들에 의해 옹립이 된 경우인 반면 인조의 경우 반정세력을 규합하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왕위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인조(=능양군)는 선조의 서자인 정원군과 연주군부인 구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선조에게는 서손에 해당했다. 문제는 혈통으로만 보면 인조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이는 앞선 중종의 경우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 소생이었다는 점과 비교해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김포 장릉.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으로, 원종은 인조의 생부로 1632년 추존을 통해 왕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 전례에 따라 생부인 정원군을 대원군으로 추존했다. 여기까지는 여느 왕들과 다름이 없는 일로, 그런데 선조-인조 때의 종법(宗法)과 관련해 문제가 발생한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뒤 기존의 왕이었던 광해군은 종법 질서 상 부정당하며, 기록이 삭제된다. 이렇게 되다 보니 인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명분은 선조(=기록상 선묘)의 법적 아들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 ‘선조-정원군-인조’가 아닌 ‘선조-인조’로의 법적 혈통이 만들어지면서 항렬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이정구는 인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전하께서 선묘의 아들이 되면 정원 대원군은 전하에 대하여 형제간이 되어야 마땅한데, 어떻게 백숙으로 부를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전하께서 선묘에 대해서는 부자의 도리는 있지만 부자의 이름은 없고, 정원 대원군에 대해서는 부자의 이름은 있지만 부자의 의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생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또 뒤를 잇는 그 가계(家系)에 아버지라고 부를 대상이 없게 되었고 보면, 천륜이 결여된 것이니, 이런 일은 결코 행할 수가 없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인조 1년(=1623년) 5월 7일 기사 중

결국 이 같은 문제는 인조로 하여금 자신의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계기로 작용을 했으며, 이에 대해 다수의 신하들이 일개의 왕자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냐며 반대를 했다. 특히 윤상과 신흠의 경우 “제후의 지자는 종묘의 차원에서 보면 소종(小宗)이니, 대종(大宗)에 중점을 두고 소종에 대해서는 강복(降服)하는 것이 예입니다”라고 언급하는데, 한마디로 종법 질서는 혈연이 아닌 종통을 중점으로 움직이기에 인조의 이 같은 행동은 소종과 대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 봤고, 이러한 전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불가하다는 반발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인조는 해당 건에 대해 우호적인 인사들을 임명하면서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 결과 마침내 1632년(=인조 10년) 정원대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게 된다.

■ 정원군을 바라보는 기록의 단면들, 만들어진 역사의 한 장면

앞서 언급했던 <장릉지>의 행장을 보면 정원군에 대해 “원종은 어려서부터 의표가 남달라 선조가 사랑스러워하고 또한 기특하게 여겼다. 점차 성장하자 장중하고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효도와 우애는 타고 났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행장의 기록은 사실일까?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원군에 대한 평가는 이와는 상반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관의 평가를 보면 “여러 왕자들 중 임해군(臨海君)과 정원군(定遠君)이 일으키는 폐단도 한이 없어 남의 농토를 빼앗고 남의 노비를 빼앗았다”고 적고 있다.

파주 장릉.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능으로, 아버지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인조는 그야말로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

또한 정원군의 궁노들의 행패 역시 논란이 되었는데, 하원군 궁노들과 서로 싸우다가, 하원군 부인을 정원군의 집 문 앞에 가두는 행패를 벌였다. 하원군은 덕흥대원군의 맏아들이자 선조에게는 형이 되는 인물로, 덕흥대원군의 위패가 봉안된 곳에서 하원군 부인을 욕보인 것이다. 때문에 이를 제지하지 않은 정원군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당시 큰 문제로 비화가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정원군과 관련된 기사를 보면 좋은 평가 보다는 부정 평가가 압도적으로 많고, 성정이 난폭한데다 방탕한 생활로 악명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자연스럽게 위의 <장릉지>의 행장 기록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교차 분석해보면, <장릉지>의 기록이 만들어진 역사의 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들을 잘 만나 왕이 될 수 있었던 정원군. 왕이 되면서 그간의 부정적인 기록이 세탁되며, 만들어진 역사의 한 장면을 볼 수 있다.

인조의 우격다짐에 의해 서자인데다 일개 왕자에 불과했던 정원군은 왕으로 추존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역사에서 이러한 사례는 오직 정원군, 즉 원종에게서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김포 장릉은 외형상 왕릉의 격식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인조의 관심은 남다른 것이었다. 당시 밖으로는 명, 청 교체기에 해당하는 시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둔감한 채 그저 아버지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인조의 행동은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던 인조의 가계는 이후 조선 왕실의 계보가 완성이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계보가 만들어지는 첫 시작이 바로 아들을 잘 만나 왕이 될 수 있었던 정원군이라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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