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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헤아림’에 대하여

기사승인 2019.09.11  18: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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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생각했어요. 수술이 끝나면 저 사람이랑 이혼해야지 하고요.” 20대 중반에 결혼을 하고, 30대 초반에 연년생 두 아들의 엄마가 된 지인이 말했다. 그리곤 이어갔다. “그런데 자궁수술을 하고 말끔하게 수술이 잘 끝났다는 판정을 받으니, 우리 가족모두가 저보다 더 힘들면 힘들었지, 덜 힘들진 않았겠더라고요. 그 마음을 그제야 알았던 것 같아요.” 어림잡아 적어도 5년의 세월. 얼마나 많은 나날을 울고 자신을 다독이며 지냈으면, 저런 말을 담담하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공감.’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국어사전의 단어 풀이라면 나는 고작 ‘눈물 몇 방울’로 공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연민도 아니었다. 그것은 ‘헤아림’이었다. 짐작하여 가늠하거나 미루어 생각해보려는 것. 공감이 ‘그래 맞아’라면 헤아림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나는 이해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나 역시 내 몫의 고통과 삶의 무게를 직면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가족과 가정, 사회에 의해 다시 한 번 엄마로 키워지고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맺는 여러 관계들로 인해 하나씩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다(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래서일까. 전보다 엄마 그리고 여성들의 각기 다른 감정선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농축된 아픔을 헤아릴 수 있게 된 듯싶다.

근래에는 ‘비건(물로 만든 제품의 소비를 거부하는 사람이자 소비자운동)’에 대해서도 헤아림을 경험했다. 치료 차원에서 두 달 가량 고기를 먹지 않아야 했는데, 안 먹다보니 안 먹어도 문제없다는 걸 느꼈다. 더 나아가 “도살장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면, 모든 사람들은 채식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톨스토이도, 동물에 대한 ‘하향의 타자화’를 경계하며 ‘윤리적 채식’을 지향하는 이들의 말도 뭔지 알 듯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말들을 ‘모두 헛소리’라고 규정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대표적으로 ‘공감의 배신(시공사)’ 저자 폴 블룸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가 말이다. 그는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고, 공감은 친구나 부모, 남편, 아내로서의 역할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폴 블룸은 인간에게 이성을 바탕으로 숙고하는 능력이 있고, 이를 통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여러 가지 과학적 데이터를 통해 ‘공감’이 결국에 더 ‘비생산적’이라는 논지를 펼쳤을지 몰라도, 나는 ‘공감’은 아니더라도 ‘헤아림’의 시도는 인간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그들과의 차이를 통해 더 나 자신을 알게 되지 않던가.

근래 먹먹하게 읽었던 소설책 ‘딸에 대하여’(김혜진, 문학동네)에서는 레즈비언 딸을 둔 요양보호사 엄마가 나온다. 어찌보면, 엄마의 고백글 같은 책에서는 엄마와 딸의 관계, 갈등, 투쟁, 애증, 재정립을 넘어선 ‘헤아림의 시선’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내가 엄마잖아요. 이 세상에 나 말고 누가 그런 일을 하려고 하겠어요.” (‘딸에 대하여’p.83)

이런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의 타자를 중심과 바깥,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지 않고, ‘공감’과 ‘헤아림’을 걷어차지 않고, 혐오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덮어주려 하며, ‘나’에서 ‘너’, ‘우리’로 이야기를 확대해가는 사람들. 폴 블룸 교수가 비웃으려나.

이소영 기자 mail@newstower.co.kr

<저작권자 © 뉴스타워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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