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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이 낳은 재인청 춤의 대가 이동안, 제대로 조명돼야

기사승인 2019.02.21  03: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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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안은 화성이 낳은 위대한 재인청의 춤꾼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인이다. 우리 공연예술의 근원이자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내면서 전통문화의 기틀을 세우는데 기여했다. 1937년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전국에 흩어져 있던 우리 춤을 집대성 및 재구성해 처음으로 무대에 올림으로써 ‘근대춤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인 승무 보유자 한영숙과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인 태평무 보유자 강선영을 길러낸 충남 홍성 출신 한성준과 더불어 전통 춤에 있어서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인 의미는 한성준이 더욱 크게 다가올 수 있으나 그는 고수로서 뛰어난 인물이었고, 춤과 관련해서는 이동안이 더욱 실력과 전문성이 있었다.

이동안이 예술적으로 영향을 받은 재인청은 기록상으로 1784년부터 1920년까지 130여년에 걸쳐 존재한 세습무들로 구성된 전문예인 집단이다. 1784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다. 경기도 오산시 부산동에 있었던 경기재인청이 1836년 경 회원 수 4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가장 규모가 크고 권위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전국의 실력 있는 재인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유교가 지배했던 엄격한 신분질서의 조선시대에 예술에 종사했던 세습무들은 백정, 승려 등과 함께 천민계급에 속했는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계모임 형태의 청(廳)을 개설했다. 사회의 배제로 인해 이들은 일반인들 속에 어울리지 못하고 철저한 규범과 직제, 관리 등을 바탕으로 집단생활을 했다. 기예에 대한 교육을 엄격히 했으며, 일정 수준에 도달한 사람만을 계원으로 받아들였고, 경기도 일대의 굿을 담당했다.

재인청 소속 재인들은 꽹과리·북·장고·피리·대금 등의 악기연주, 승무·태평무·도살풀이·양반춤·진쇠춤·신칼대신무 등의 춤, 소리, 재담, 줄타기, 곡예 등에 뛰어난 전문 직업 예능인들이었다. 오늘날 공연과 관련한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의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재인청 예술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공연예술의 뿌리가 사실상 세습무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동안의 가계 역시 대대로 무업(巫業)을 주업으로 하던 경기재인청의 재인(才人)들이었다. 이동안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 137번지에서 아버지 이재학과 어머니 해주 오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경기재인청 소속으로 해금 전문가였으며, 조부 이하실은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다. 작은 할아버지 이창실은 줄타기 명인으로, 친가와 외가 모두 최고의 재인들이라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재인의 피를 물려받고 민속예술의 환경에서 자라났다.

글공부를 시키려는 부친의 마음과는 달리 그는 책을 피해 서당을 빼먹기 일쑤였고, 결국 열세 살 되던 해 무동(舞童)시켜 준다는 말에 솔깃해 사당패를 따라 나서 처음으로 무동춤과 줄타기를 배웠다.

10대 후반 서울에 올라와 광무대(光武薹)에서의 공연 생활을 한 그는 이곳에서 경기재인청 출신인 춤과 장단의 명인 김인호, 줄타기의 명인 김관보, 발탈과 재담의 명인 박춘재, 남도소리의 명인 조진영, 대금 피리 해금의 명인 장점보, 태평소의 명인 방태진 등으로부터 각종 기예를 익혔다. 재인청의 전문 예술가이자 당대 최고의 명인들로부터 배운 정통성 있고 수준 높은 기예는 이후 이동안이 경기재인청 춤의 전승자로, 줄타기 명인으로, 중요무형문화재 발탈의 보유자로 나아가는 바탕이 된다.

■ 재인청 춤의 대가 이동안, 화성시에서부터 제대로 평가돼야

이동안은 특히 당대 최고의 춤꾼이었던 김인호로부터 승무, 검무, 입춤, 살풀이, 태평무, 진쇠춤, 성진무 등 30여종의 재인청 춤을 전수받음으로써 우리 춤 역사의 주요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경기재인청 출신의 김인호는 용인 태생으로 어전(御殿) 광대 반열에 올랐던 당대 제일의 춤꾼으로 재인청의 모든 춤의 유형과 그 장단에 정통한 명인이었다. 1900년대 초 처음으로 무용과 연극을 함께 공연하며 전국 최고의 재인들이 출연했었던 서구식 극장 형식의 광무대의 주요 출연자이면서 권번에서 기생들에게 춤을 가르쳤던 춤 선생이기도 했다. 춤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다른 권번의 춤 선생들이 김인호에게 춤을 배우러 오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시대 권번은 궁중여악(宮中女樂)을 담당했던 궁기(宮妓), 무동(舞童), 악공(樂工)들이나 지방 관청 관기들이 흘러 들어가고 엄격한 교육이 진행되면서 전통예술이 생산, 유통되는 중요한 거점의 역할을 했다.

재인청의 춤은 장단 등에서 경기도당굿과 연관성이 깊은 민속춤의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전문 춤꾼들에 의해 내용과 형식이 다듬어진 미화된 전통춤이라 할 수 있다. 이동안은 재인청 출신의 김인호로부터 춤을 전수받음으로써 민속춤의 원형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동안은 일제시대 전설적인 월북 무용가 최승희에게 장고무와 승무, 태평무, 승전무, 진쇠춤, 입춤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최승희는 이동안과 한성준 등 당대 최고의 전통 춤꾼에게 배운 내용을 자신의 창작무용에 적용하면서 칼춤과 부채춤, 승무 등을 현대화하는데 성공해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으며 세계적인 무용가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이동안은 말년에 수원 행궁의 화령전에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 내는데, 그 중 한명이 수양딸로 삼았던 고 정경파이다. 정경파는 1991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8호인 재인청 계열 승무 살풀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이동안과 정경파의 제자인 김복련이 2002년부터 현재까지 승무 살풀이의 예능보유자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윤미라, 정주미, 이승희, 박경숙, 박경현, 이선영 등이 현재 이동안의 춤을 어려운 여건에서도 전승하고 있다.

이동안은 악기연주와 춤, 줄타기, 발탈 등 다방면에서 인간문화재감이라는 평가를 받던 최고의 예능인이었지만 특히 재인청의 춤을 온전히 전수받은 국보급 인물이다. 그러나 한성준이 승무의 한영숙과 태평무의 강선영이라는 인간문화재 제자를 배출하면서 문화예술계의 주목과 인정을 받는 반면, 전통춤의 원형을 간직한 재인청 춤의 대가인 이동안은 무형문화재 중심으로 춤이 주목받고 평가되는 세태 속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재인청 춤의 전승이 위기 상태인 심각한 상황이다. 춤이 아닌 발탈(중요무형문화제 제79호)로 보유자가 된 이동안이 “내가 안하면 끊긴다고 해서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지만 사실 나는 춤꾼이지 발탈 재주꾼은 아니다”라고 한탄했던 이유이다.

위대한 춤꾼 이동안에 대해 화성시민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의 예술과 인생에 대한 조명과 홍보가 그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인청 춤의 대가 이동안에 대한 올바른 재평가는 그가 태어난 화성시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조백현 발행인 mail@newstower.co.kr

<저작권자 © 뉴스타워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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