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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에 위치한 벽제관, 중국 사신들이 머문 객사이자 벽제관 전투의 현장

기사승인 2018.06.23  12: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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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지금도 공무상 일로 지방 출장을 가게 되면 숙박을 하게 되는데, 대개 회사 측에서 숙박을 잡아주거나 숙박비용을 주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인데, 사신이나 혹은 공적인 일로 지방 출장을 간 관리들은 관아 내에 자리한 객사에서 숙박을 했다. 보통 관아에 있는 객사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동시에 건물의 가운데 ‘중대청(中大廳)’에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 혹은 전패를 모시고, 특정한 날에 한양의 대궐을 향해 망궐례 의식이 펼쳐졌다. 어떻게 보면 ‘충성서약’으로 볼 수 있는 행동으로, 객사의 외형을 보면 가운데가 돌출된 듯 높은 것도 격의 차이를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중대청의 좌우에는 ‘동헌(東軒)’과 ‘서헌(西軒)’이 있는데, 사신이나 관리들은 이곳에서 머물렀다.

중국 사신들이 한양에 들어오기 하루 전 머물렀던 벽제관이 있던 자리. 지금은 초석만이 남아있다.

■ 중국 사신들이 하루 전에 머물렀던 벽제관

오늘 소개할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 위치한 ‘벽제관(碧蹄館)’ 역시 과거 중국 사신들이 한양에 입성하기 전 머물렀던 객사 건물이었다. 당시 벽제관은 벽제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역(驛)’은 역참으로 불리며 역마를 비치했다. 이는 봉수와 함께 조선시대의 주요 통신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벽제역이 군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중국 사신이 한양으로 들어오기 하루 전 이 역에서 반드시 머물도록 한 기록과 당시 벽제관의 모습이 남아있다.

“동헌(東軒) 앞에는 못을 파서 연(蓮)을 심었고, 서헌(西軒) 앞에는 돌을 빼고 우물을 팠다. 여름과 봄 사이에는 햇볕이 명랑하고, 연꽃이 향기로우며, 샘물이 차고 맑으니, 이것은 또 다른 현에는 없는 것이다. 문묘(文廟)와 학교를 건립하고, 남별관(南別館)과 옛 관청도 옛 제도에 보태기도 하고 새 집을 창건하기도 하여, 차례로 이루니 웅장한 모습이 서로 바라보인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 고양현 편

현재 벽제관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며, 초석만이 당시 웅장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중국 사신들이 이용한 이유로 조선시대까지는 잘 보존이 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건물의 일부가 헐리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남게 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있다.

옛 사진 속에 남아있는 벽제관의 모습

■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와 벽제관 전투가 있었던 현장

벽제관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데, 바로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선조의 한양을 떠난 파천이 그것이다. 당시 삼도도순변사인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순절하면서 조선 조정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이어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파천이 결정되었다. 4월 30일 비가 쏟아지는 한양을 떠난 선조의 행렬은 점심때에 이르러 벽제관에 이르렀다. 워낙 급하게 떠나다 보니 호송하는 관리들이 1백 명이 채 되지 않았고, 점심을 먹을 때는 왕과 왕비 이하 반찬이 없을 정도였다. 벽제관을 떠난 선조의 행렬은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하기 이르고, 이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승리와 명나라의 참전으로 임진왜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제는 조선과 왜와의 전쟁이 아닌 동북아시아의 국제전으로 확전이 된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초석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벽제관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파천을 하며 지나갔던 곳이자 벽제관 전투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 명나라의 제독으로 전쟁에 참여한 이여송은 평양성 수복의 기세를 몰아 벽제관으로 남하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벽제관 전투다. 하지만 명나라는 얕보던 왜군에 의해 대패를 하게 되고,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깨닫게 된다. 벽제관 전투 이후 명나라 장수들은 싸울 의욕을 잃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이여송이 오로지 철군만을 생각하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후 임진왜란은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고, 선조는 벽제관 전투에서 죽은 중국 군사들을 위해 단을 만들고 ‘치제(致祭)’, 즉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이처럼 지금은 그저 초석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벽제관의 모습이지만, 중국 사신들이 오가며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자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 전투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김희태 기자 mail@newstower.co.kr

<저작권자 © 뉴스타워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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